출산 준비
음력 1989년 12월 29일, 오전 8시쯤, 이슬(피)이 비쳐 부랴부랴 다니던 개인 산부인과로 향하였습니다. 그 때 나는 함께 살던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언니네 집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을 때였습니다.산부인과 병원(그 당시에는 산부인과 병원이 참 많았는데)에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자궁이 얼마나 열렸는지를 확인하고는 바로 관장을 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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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산을 하기 위해 진통중에 큰병원으로 이송됨 |
자궁은 겨우 1센티 정도 밖에 열리지 않았는데 바로 촉진제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 약 기운이 전신으로 퍼지는지 진통이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연락을 받은 상 중에 있던 남편과 친정식구들은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다들 밖에서만 있어야 했기에 그저 안에서 병원 측으로부터 전해주는 소식만 듣고 이제나 저제나 하는 마음으로 계속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또한 밖에 누가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주기가 점점 더 빨라지는 진통
점점 더 진통 주기가 빨라지기 시작하였고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고통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간호사(그때는 호칭이 그랬습니다)가 연신 들락거리며 산모의 상황을 체크했지만 진통에 비해 아기가 아래쪽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데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곧 2~3시간이면 자연 분만을 할 줄 알고 있었지만 촉진제로 인한 강제 진통만 계속되었을 뿐 정말 뭐라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음력으로 12월 29일이다 보니, 이틀 후면 구정 명절이 시작되니, 자기들끼리 하는 말도 들렸습니다. 집에 간다고 표를 예매해 놨다는 등 어디로 가야 한다는 등. 병원에서는 급했는지 오후 세 시가 넘자 손으로 양수를 터뜨렸습니다. 뜨거운 물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여전히 진통은 계속되었고 아가는 여전히 나올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지, 때가 되면 자궁 아래 위치로 내려와야 된다는데 영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시로 간호사 선생님들이 번갈아 가면서 체크해 보고 하지만 별 진전이 없어 보였나 봅니다.
나보다 더 힘들었을 우리 아기
아기는 어땠을까? 아기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외부로부터 어떤 침입이 있다 보니 '이거 뭔 일이야'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고 경계 태세가 되어서 자꾸만 위쪽으로 붙었던 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때인가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우리 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서야 딸의 마음이 전해져 왔습니다. '아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었구나 양수도 없이 숨쉬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풍선도 공기가 꽉 차 있을 때는 그 안에 공기가 풍성하지만 어느 한쪽으로 바람이 빠지기 시작하면 이곳 저곳이 눌어붙듯이 우리 딸에게도 아기에게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으니 마음이 너무 아팠고 딸도 그 고통이 무척이나 심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함께 누워 딸에게 얘기를 해 주면서 '엄마만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딸은 더 힘들었겠네 엄마가 미안해' 하면서 함께 울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계속되는 진통으로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병원 입장에서도 곧 명절인데 각자의 스케쥴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병원에서는 자신들이 생각했던 대로 아가가 빨리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갑자기 심박동 수를 측정했습니다.
아기는 살아있어요
산모와 아가의 심박동수를... 기계를 통해 들려오는 아가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급하게 간호사 선생님이 "이 소리가 아기가 쉬는 숨소리니 아기는 괜찮아요" 합니다. 그러더니 의사 선생님이 남편에게 아무래도 큰 병원으로 옮겨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넉넉히 잡아도 열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의 헛된 시간들을 보내고 결국에는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니...
진통의 고통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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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속되는 진통으로 인해 지쳐만 가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