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기쁨도 잠시 : 첫아기의 탄생 (04편)_EP005

출산한 지 5일 정도 지나니 병원에서 아기는 퇴원 시킬 거냐고 의사를 물어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보통 수술한 산모는 일주일 정도 있고, 아기는 5일 정도에 돌봐줄 사람이 있으면 퇴원 시킨다고 들 하였습니다. 나도 처음 겪는 일이라 병원에서 그렇게 얘기 해 주니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기다렸던 퇴원이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나 말고도 위로 언니가 둘이 있었고 두 언니가 다 조카들을 출산하였을 때 당연히 친정집에서 엄마가 산 후 수발을 다 해주셨기에 나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철이 들고 나서 보니 그 수발이 얼마나 힘든지 알았고 엄마에게 너무 죄송했습니다.

아가의 황달기를 치료하기 위해 신생아실에 입원

아가와의 짧은 이별

시골에 있는 친정집으로 아기는 퇴원을 시켰습니다. 나도 얼른 퇴원해서 아기랑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자연 분만한 산모들은 당일 날 퇴원하는 경우도 있어 부럽기만 하였습니다. 

지루한 나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들러주는 여동생이 아기가 황달기가 심한 거 같다고 걱정을 하였습니다.

직접 눈으로 볼 수가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었지만 예전 어른들은 "태어난 애들은 다 황달기는 있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시면서 동생에게 그러셨다고 합니다. 동생이 보기에는 좀 심한거 같다고 걱정을 하면서. 

친정 부모님께서는 6남매를 낳아서 기르셨으니 다들 처음에는 그런 증상이 있었다가 사라졌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듯 보였습니다.

드디어 산모인 나도 퇴원을 하고 남편과 함께 친정집으로 갔습니다. 아기를 볼 수 있다는 거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왔습니다. 아기의 상태가 어떤지 몰라 택시기사님에게 잠깐 기다려 주십사 부탁을 하고 집에 들어서서 아기를 보았습니다. 아기 눈에는 눈곱도 끼어 있는 거 같았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수술 후라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바로 남편에게 아기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고 오라고 부탁해서, 다시 병원으로 갔습니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남편이 혼자서 터덜터덜 돌아왔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아가의 입원

애타게 기다린 나는 "왜 아기는 없고 혼자 와?" 그랬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병원에서 진료를 한 결과, "황달기가 심하니 며칠 입원을 해서 치료해야 된단다"고 해서 입원시키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시 아기는 신생아실에 입원을 하였고 여동생이 가서 보면 눈에 안대를 씌우고 무슨 빛을 쪼이는 거 같다고 전해 주었습니다(의학적으로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해들은 말은 그랬습니다). 

여동생이 전해 주는 아가의 상태와 제가 매일 신생아실로 전화를 해서 아기의 황달 치수가 떨어졌는지와 얼마까지 떨어져야 퇴원이 가능한지를 묻고 듣고 '언제 퇴원하라고 할까'를 기다리면서, 연락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기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상태는 출퇴근하면서 점심시간에 잠깐 가서 보고 온 동생이 전해주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인큐베이터안에서 치료중인 우리 딸: 일반인의 입장에서 본 내용임 (AI 이미지)

1990년대에는 그나마 많이 나아지기는 했어도 시골은 여전히 교통 편이 열악하였습니다. 시내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을 때이고 집에 자가용을 가진 집들도 많지 않을 때였고, 우리야 당연히 자가용이라는 건 꿈도 꾸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4~5일인가 지나니 드디어 퇴원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아기를 퇴원시켜 데리고 왔습니다. 신생아실에서 혼자 입원하고 있었을 우리 딸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시댁으로 복귀

친정집에서 그렇게 한 달 정도 산후를 보내고 시댁으로 복귀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파트가 거의 없었던 때였기에 대부분 사람들은, 단독 주택에서 겨우 방 하나에 조그마한 부엌이 달린 방에서 전세를 살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사람들은 2층 단독주택에서, 주인은 1층, 전세자들은 2층을 통채로 빌려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2층을 통째로 빌려 전세로 살기 위해서는 600만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리는 전세자금 조차도 없었기에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20평 대 단독 주택이었던 시댁으로 들어가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좁았던 우리 시댁에서조차도 애가 있는 젊은 부부에게 전세를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들어가 살기 위해서는 그 가족에게 전세 자금을 빼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돈이 우리 수중에는 없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직장으로 출타를 나오던 '한일은행'에서는 직원들에게 퇴직금을 담보로 해서 최대 300만원까지 신용대출을 해 주는 금융상품이 있었습니다.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귀여운 아가의 목욕시간

시댁이 오래된 좁은 단독 주택이다보니, 실내에는 그 어떤 화장실도, 목욕탕이라는 곳도 없었습니다.  우리 시댁뿐만 아니라 그때는 모두가 목욕탕에 가서 한번씩 때를 벗겨야만 하는 시대였습니다. 

우리 아기를 목욕시키기 위해서는 저녁마다 물을 가스렌지에서 데워야 했습니다. 데워진 물을 큰 대야에 담고 온도를 맞추어서 우리가 살던 3평 정도 되는 방으로 들고 들어옵니다. 

아기를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안고 거즈로 얼굴을 씻기고 머리를 감기며 조심스럽게 물에 담가 살살 물을 저고리 위에 뿌려주면서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해 주었습니다.

아이가 물에 적응이 된 거 같으면 저고리를 벗겨 부드러운 거즈로 온 몸을 닦아주고 나면 얼마나 뽀얗고 예쁜지 힘 든 줄도 모르고 매일매일 혼자서 그렇게 목욕을 시켜 주었습니다. 남편은 일주일이면 두 세번 정도 야근근무를 해야 했기에... 

1990년도에는목욕을 이렇게 했어요 (삽화)

밤중에 아가의 목욕시간 (삽화)
그때를 회상해 보면

그래도 역시 자식이라 그런가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었던 시절이었던거 같습니다.
요즘의 젊은 세대들은 상상조차 못하겠지만, 6.25를 겪으셨던 우리 부모의 세대 생활상에 비하면 그마저도 정말 풍족한 생활이고 환경이었습니다.

뒤돌아 보니 30~40년 전, 제가 살았던 우리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30대를 살고 있는, 우리 자녀들이 일반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던 때의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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